개요

21세기 글로벌 기업 경쟁의 승부처는 기술 혁신으로 옮겨갔다. 세계 시가총액 1, 2위를 다투는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두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모두 공학도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팀 쿡 애플 CEO는 산업공학을 전공했고,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는 전자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다. 이처럼 현대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춘 리더십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한국 기업들은 경영·재무 중심의 전통적인 리더십에 머물러 있다. 과연 이러한 리더십 격차는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일까? 그리고 기술 기반 리더십으로의 전환은 왜 필요한가?

생산 효율의 시대에서 마케팅의 시대로, 그리고 기술의 시대로

기업 리더십의 중점은 시대에 따라 변천을 거듭해왔다. 1930년대 전후의 산업 시대에는 기업 성공의 최우선 과제가 생산 효율이었다.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식 대량생산으로 상징되는 이 시기에는 얼마나 싸고 많이 생산할 수 있는지가 경쟁력의 핵심이었고, 경영진도 공장 운영과 원가 절감에 능한 인물이 중용되었다. 실제로 당시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발명가나 생산기술 전문가가 맡는 경우가 많았다. 불황과 전쟁을 겪던 시절, 리더십의 가치는 생산 설비를 극대화하고 비용을 낮추는 능력에서 나왔다.

이후 1950~60년대에 들어 경제가 성장하고 소비 시장이 확대되자, 기업들은 더 이상 생산량만으로 승부를 낼 수 없게 되었다. 경쟁사가 비슷한 물건을 똑같이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마케팅의 시대가 열렸다. 이 시기의 성공한 기업들은 무엇을 만들지보다 어떻게 팔지에 집중했다. 제품 기획, 브랜딩, 광고 전략이 경영의 전면에 부상했고, 창의적인 마케팅 감각을 지닌 리더들이 각광받았다. 예컨대 미국의 자동차 업계에서는 GM이 매년 모델 체인지를 도입하고 브랜드별 마케팅을 강화해 포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기업 CEO의 면모도 바뀌어, 이공계 출신보다는 영업·마케팅 전문가나 MBA 출신 경영인이 대거 등장했다. 기업 리더십의 무게중심이 생산 현장에서 시장으로 이동한 것이다.

1980년대를 거치며 또 한 번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세계화와 금융 시장의 발달로 재무 관리와 주주가치 극대화가 경영 화두로 떠올랐다. 이 시기에는 컨설턴트 출신이나 재무 전문가들이 기업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며 구조조정과 효율화를 진두지휘했다. ‘월가식’ 경영 기법과 합병·인수 같은 단어들이 일상화되고, 주가와 실적에 민감한 리더십이 강조되었다. 한편으로는 일본식 품질 경영이나 6시그마 등 운영 효율을 위한 전문 경영 기법도 각광받아, 생산현장 출신과 기획·재무 출신이 함께 최고경영진을 구성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리더십의 지형은 다시 한 번 크게 뒤바뀌었다. 인터넷의 보급과 IT의 발달로 산업의 판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 초 닷컴 붐을 전후해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신흥 IT 기업들이 등장했고, 전통 기업들도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경쟁우위는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빨리 개발·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를 계기로 기업들은 다시 기술로 눈을 돌렸고, 경영 최전선에 기술 전문가들이 부상했다. 다시 말해, 기술 중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생산 효율에서 마케팅, 재무를 거쳐 이제는 혁신과 기술력이 최고경영자의 최우선 덕목이 된 것이다.

글로벌 빅테크 CEOs의 공학도 열전

현재 전 세계를 이끄는 빅테크 기업들의 수장을 살펴보면 이러한 흐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때 기업 경영자의 필수 조건처럼 여겨지던 MBA보다, 이제는 공학 석·박사 학위나 프로그래머 경력이 더욱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구글의 CEO를 맡고 있는 순다르 피차이는 인도공과대학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공학도 출신이며, 이후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물질공학 석사를 취득한 기술 전문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CEO 또한 전자공학 학사 출신으로, 회사 내 개발자 경험을 거쳐 클라우드 사업을 이끌었던 기술통이다. 아마존을 창업한 제프 베이조스는 대학에서 전자공학과 컴퓨터과학을 전공했고, 직접 초기 쇼핑몰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를 설계한 프로그래머 CEO였다. 페이스북(현재 메타)을 창업한 마크 저커버그는 하버드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했고, 서비스를 직접 코딩해 세상을 바꾼 인물이다. 일론 머스크 또한 물리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소프트웨어 코딩에 능통한 사업가로, 전기차와 우주산업 등 첨단 분야에서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애플의 팀 쿡 역시 산업공학 학위를 지닌 채 공급망 최적화 전문가로 커리어를 쌓아 애플의 수익성을 높였던 경영자다. 비단 미국뿐 아니라, 중국의 대표적 기술 기업인 텐센트의 마화텅(포니 마) 회장은 컴퓨터공학 전공으로 QQ와 위챗 같은 플랫폼 개발을 주도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데이터도 이러한 추세를 뒷받침한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가 2018년 발표한 글로벌 CEO 분석에 따르면, 세계 상위 100대 최고경영자 중 공학 학위 보유자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 조사에서 상위 100명 중 34명이 공학도를 배경으로 둔 CEO였고, 32명이 MBA 출신이었다. 특히 상위 20위권 CEO로 범위를 좁히면 절반가량이 엔지니어 출신일 만큼, 오늘날 최고의 경영자는 기술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는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경영대학원(MBA) 출신이 곧 엘리트 경영인의 대명사였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양상이다. 이제 글로벌 무대에서는 “공대를 나와야 CEO도 잘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술 역량이 곧 경영 역량과 직결되고 있다.

이처럼 빅테크 기업들의 기술 리더십은 단지 학벌이나 이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성과가 이를 증명한다. 클라우드 컴퓨팅, 모바일 OS, AI, 전기자동차, 우주개발 등 새로운 산업 지형을 개척한 기업들의 공통점은 최고경영자가 기술의 가능성을 신속히 포착하고果断(과단)하게 투자했다는 점이다. 구글이 초창기부터 AI 연구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건 순다르 피차이 같은 기술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고, 마이크로소프트가 PC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클라우드와 AI 선도 기업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도 나델라의 기술 통찰 덕분이다. 아마존이 이커머스에서 클라우드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지금은 인공지능 비서와 헬스케어까지 확장하는 전략적 행보에도 기술에 정통한 수장의 안목이 크게 작용했다. 요컨대, 기술 기반 리더십이야말로 현대의 초일류 기업들을 탄생시킨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기업 리더십의 현실: 여전히 재무·기획 통이 주류

그렇다면 한국 기업들의 상황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국내 대기업들의 리더십은 여전히 전통적인 경영·재무 중심에 머무른 사례가 많다. 역사적으로 한국 대기업들은 창업주 일가의 오너 경영과 더불어, 전문경영인 체제에서는 기획조정실이나 재무부서 출신 인사들이 중용되어 왔다. 회사 전체를 보는 시야와 조율 능력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전략기획 통이나 재무 전문가들이 CEO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고, R&D 전문가나 엔지니어 출신이 최고경영자에 오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이러한 경향이 수치로 드러난다. 한 조사에 따르면 2020년대 초 기준으로 국내 30대 그룹에서 R&D 부문을 거친 ‘기술통’ CEO는 전체의 5% 남짓에 불과하다. 반면 재무나 전략 부서 출신의 CEO 비중은 수십 퍼센트에 이르러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생산·영업 등 기타 분야가 채우고 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최상위 기업 100곳 중 단 몇 곳에서만 연구개발 출신 인물이 최고경영자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 전년 대비 기술통 CEO가 약간 늘어나는 움직임이 보이지만, 여전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공계 전공자 출신의 CEO 자체는 예전보다 늘어났다. 1970~80년대만 해도 법대나 상경계열 출신이 아니면 임원 승진이 어렵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공대 출신도 경영 일선에 많이 진출하고 있다. 국내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한 2024년 조사에서는 CEO의 약 45.5%가 이공계열 전공자로 나타났다. 이는 10여 년 전 40% 남짓했던 것에서 조금 증가한 수치다. 그러나 이 숫자는 어디까지나 학부 전공 통계를 집계한 결과일 뿐이다. 실제로 회사 내에서 연구원, 개발자 등의 기술 부서를 거친 경영자가 몇이나 되는지를 따지면 사정은 달라진다. 신입 때 공대 출신이더라도 대리, 과장 때부터 기획이나 영업으로 전환해 경영 수업을 받은 경우가 많고, 결국 CEO 자리에는 “공대 나온 기획통”이 앉는 식이다. 그렇다 보니 정작 순수 기술 전문가의 관점에서 미래 기술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최고경영자는 찾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의 간판 기업들을 사례로 보더라도 이러한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글로벌 전자산업을 주도하는 삼성전자에서 역사적으로 그룹 회장이나 부회장 자리는 창업주 일가가 맡아왔고, 전문경영인 부문에서도 재무·영업통이 주로 중용되어왔다. 한때 반도체 개발 책임자로 삼성의 신화를 만든 기술자 출신의 황창규 사장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그는 끝내 그룹 수장이 되지는 못했다. 자동차 산업의 현대차그룹 역시 마찬가지다. 창업주 이후 경영권을 승계한 경영진들은 해외 MBA나 경영학 전공자로서 재무 관리에 능한 면모를 보였지만, 정작 전기차·자율주행 등 신기술에 대한 비전 제시는 주로 조직 내 기술 임원들의 몫이었다. LG그룹도 과거 오너 경영체제에서 벗어나 전문경영인 체제를 강화해왔지만, 그룹 회장이나 계열사 CEO 상당수가 기획실을 거친 관리형 인사가 많았다. 한편 국내 인터넷 산업을 개척한 네이버와 카카오는 예외적으로 이해진, 김범수 같은 공학도 창업자가 회사를 키운 사례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인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나 산업공학 전공의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는 기술적 통찰과 결단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스타트업 출신 IT 기업에 국한될 뿐, 전통적인 제조·금융 대기업에서 기술자 출신이 최고경영자로 등극하는 일은 여전히 드물다.

이러한 리더십 구조의 문제점은 미래 경쟁력 측면에서 우려를 낳는다. 한국 기업들은 반세기 동안 fast follower 전략으로 성장해왔다. 오너와 전문경영인들이 효율적인 생산관리와 전략적 마케팅으로 세계 시장을 개척한 덕분에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여러 분야에서 글로벌 선두권을 달성했다. 하지만 앞으로의 50년은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 이제는 남이 닦아놓은 길을 잘 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새로운 길을 만드는first mover가 되어야 하는 시점에서, 과연 관리형 리더십만으로 변화의 물결에 대응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특히 디지털 혁신의 속도가 빨라지는 오늘날, 최고경영진이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중요한 결정을 그르치거나 시기를 놓쳐버릴 위험이 크다.

왜 기술 중심 리더십이 필요한가

오늘날 기술 중심 리더십이 단순한 스펙의 문제가 아닌 이유는, 기술이 기업 경영의 전략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정보기술은 경영을 지원하는 하나의 부서 기능쯤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이제 기술은 기업의 새로운 먹거리와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는 핵심 동력이다. 제조업, 서비스업 할 것 없이 모든 산업이 디지털화되고 있고, AI와 데이터 분석은 의사결정의 필수 도구가 되고 있다. 자동차는 이제 바퀴 달린 컴퓨터가 되었고, 금융권도 IT 기업 못지않게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필요로 한다. 에너지 산업은 탄소중립 시대를 맞아 신소재, 배터리, 친환경 기술 혁신에 사활이 걸렸으며, 바이오 산업 역시 융합기술의 집약체다. 이러한 판국에 기업의 리더가 기술을 모르고서는 적시에 옳은 방향을 제시하기 어렵다.

기술 중심 리더십의 우선적인 장점은 변화의 파도를 읽는 눈이다. 기술에 정통한 CEO는 새로운 기술 트렌드가 나타났을 때 그 의미와 파급력을 바로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다. 예컨대, AI 챗봇이나 블록체인 기술이 등장했을 때 이를 단순한 유행으로 치부할지, 아니면 사업 모델을 바꾸는 게임체인저로 받아들일지는 경영자의 식견에 달려 있다. 기술에 어두운 경영자는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두려워해 투자를 망설일 수 있지만, 기술적 소양이 있는 경영자는 기회를 포착해 과감하게 베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퍼스트 무버로서 시장을 선점하거나, 변화에 따른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관리하는 등 경쟁자 대비 유연하고 신속한 전략을 펼칠 수 있다.

또한 기술에 대한 이해는 의사결정의 품질을 높인다. 오늘날 기업 경영은 빅데이터 분석, 통계와 확률, 알고리즘 등 과학적 접근법을 요구한다. 엔지니어 출신의 경영자는 숫자와 데이터를 다루는 데 강하고, 증거 기반 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높다. 즉, 직관이나 관행보다는 객관적 분석과 논리에 기반해 의사결정을 내리므로 실패 확률을 낮출 수 있다. 실제로 미국 벤처캐피털의 한 분석에 따르면, 기술 분야 경영자가 이끄는 기업이 순수 경영 전문가가 이끄는 기업보다 성장성과 기업가치 면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급변하는 시장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문제 해결사로 훈련된 기술 리더의 강점이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술 중심 리더십은 조직 문화와 인재 확보 측면에서도 이점을 준다. 오늘날 우수한 개발자와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제대로 이해하고 중시해주는 회사를 원한다. CEO가 기술에 무지하거나 R&D를 주변부 취급한다면 최고의 기술인재들은 회사를 떠나거나 애초에 합류하지도 않을 것이다. 반대로 최고경영자가 스스로 기술에 열정이 있고 식견을 갖추고 있다면, 조직 전체에 기술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경영진에게 환영받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험정신이 독려된다. 이는 곧 더 창의적인 신제품 개발과 신규 사업으로 이어져 회사의 장기적 성장동력을 강화한다.

한국 경제 전반으로 보더라도, 기술 리더십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세계는 지금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 있고, 각국 기업들은 AI, 로봇, 바이오, 친환경 기술 등 미래 산업 주도권을 두고 경쟁 중이다. 그런데 한국의 주력산업들이 여전히 과거 성공방정식에 안주하며 점진적 개선에 머문다면, 머지않아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위험이 크다. 노키아와 코닥의 사례를 떠올려 보자. 한때 휴대폰과 필름 카메라 분야의 최강자였던 이들 기업은 기술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경영진 탓에 순식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반면, 과감히 자기 혁신에 나선 기업들은 살아남아 새 시대의 강자가 되었다. 한국 기업들이 기술 중심 리더십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단순한 경영 트렌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인 것이다.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 변화와 제언

그렇다면 한국 기업의 리더십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기술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몇 가지 변화의 방향을 제언해 본다.

첫째, 내부 인재 육성과 발탁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기업 내 기술 인재들이 경영자로 성장할 수 있는 경로를 체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많은 대기업에서 연구원이나 엔지니어들은 일정 직급 이상 올라가기 어려운 구조에 갇혀 있었다. 이제는 유망한 R&D 인력을 조기에 발굴해, 전략기획·영업 등 다양한 보직을 경험하도록 함으로써 경영 전반의 시야를 키워줘야 한다. 엔지니어도 경영 마인드를 익히면 훌륭한 CEO 후보가 될 수 있다. “기술은 전문임원까지, 경영은 그 이후”라는 식의 암묵적 장벽을 허물고, 능력 있는 기술자가 임원은 물론 최고경영자 자리까지 오를 수 있다는 롤모델을 보여줘야 한다. 최근 일부 기업에서 CTO를 부사장급으로 격상시키고 CEO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시도는 긍정적인 변화다. 이런 움직임을 더욱 확산시켜야 한다.

둘째, 최고경영진의 지식과 의사결정 방식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지금 당장 모든 CEO를 공대 출신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현재의 경영진들이 기술 트렌드에 대한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독려해야 한다. 기업 차원에서 CEO와 임원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기술 세미나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만하다. AI가 무엇인지, 데이터 사이언스가 어떻게 의사결정을 바꾸는지, 최근 각 산업의 핵심 기술 이슈가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토론하는 문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 최고경영자 스스로 기술을 완벽히 익힐 수 없다면, 기술에 밝은 참모를 곁에 두는 것도 방법이다. 예컨대, 글로벌 기업들은 이사회에 기술 전문가를 포함시켜 중요한 기술 관련 의사결정 시 조언을 받는다. 한국 기업들도 이사회나 자문그룹에 외부 기술 석학, 스타트업 창업자 등의 목소리를 반영하면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기업 문화 전반의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기술 중심 리더십은 단순히 사람 몇 명 바꾼다고 정착되는 것이 아니다. 조직 문화가 “기술을 알아야 인정받는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최고경영자가 기술의 중요성을 입버릇처럼 강조하고, 직접 기술 관련 프로젝트를 챙기는 모습이 필요하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실험에 실패하더라도 이를 질책하기보다는 학습 기회로 삼고 격려하는 태도를 보여야, 현장 엔지니어들이 마음껏 도전할 수 있다. 또한 기업 홍보나 대외 커뮤니케이션에서도 기술 혁신 스토리를 부각시켜, 투자자와 소비자들에게 자사의 기술 비전을 분명히 알릴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모두 “우리 회사는 기술로 승부한다”는 메시지를 내포하며, 자연스럽게 내부 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힘이 된다.

넷째, 산학 협력과 외부 혁신 생태계와의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급변하는 기술 환경을 한 기업 내부 인재만으로 모두 따라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대학 및 연구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최신 기술 동향을 공유하고 인재를 확보하는 한편, 유망 스타트업에 대한 전략적 투자나 파트너십을 통해 외부의 혁신을 흡수하는 개방적 전략이 필요하다.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스타트업의 참신한 기술과 아이디어에 관심을 갖고 직접 찾아 나서는 모습은 조직 내 기술중시 분위기를 고취할 뿐 아니라, 미래 성장동력을 마련하는 지름길이 된다. 최근 몇몇 기업이 사내 벤처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유수 대학과 공동 연구센터를 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의 노력이다.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을 리더십 차원에서 주도함으로써, 기술 변화에 대한 대응력을 높여야 한다.

다섯째, 거버넌스 측면에서의 변화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가족경영 색채가 강한 기업의 경우, 차세대 경영승계자가 기술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젊은 오너 경영인들이라면 해외 명문대 경영학위만으로는 부족하고, 직접 코딩을 배우거나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이끌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본다. 만약 오너 일가에 그런 배경이 없다면, 과감히 전문경영인 중에서 기술 전문가를 그룹 수장으로 앉히는 결단도 한 번 쯤 검토해볼 만하다.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지배구조 선진화의 연장선에서, 가장 적합한 사람이 최고경영자에 오르는 문화가 정착된다면 기술 리더십 확립은 한층 쉬워질 것이다. 또한 주요 이해관계자(주주, 정부 등)들도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기술 전문성을 두루 갖춘 경영진 구성을 요구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맺음말: 기술 리더십으로 미래를 열 때

마케팅 천하였던 시대에도, 재무 논리가 지배했던 때에도 한국 기업들은 나름의 경쟁력을 구축하며 성장해왔다. 하지만 기술 중심의 새로운 시대 앞에서는 과거의 성공 방정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기술을 알아야 기업을 이끈다”는 새로운 경영 격언을 받아들여야 할 때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의 격차를 논하기 전에, 먼저 우리 기업 내부의 리더십부터 바뀌어야 한다. 다행히 변화의 필요성은 점차 공감대를 얻고 있다. 기업 현장에서도 “기술을 아는 젊은 리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정부 차원에서도 첨단산업 인재 양성을 부르짖고 있다.

기술 중심 리더십으로의 전환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진 않겠지만, 그 방향은 명확하다. 기술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갖춘 리더십은 기업에 혁신의 DNA를 심어주고, 급변하는 산업 지형 속에서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반대로 변화에 둔감한 관리형 리더십은 서서히 기업을 정체시키고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한국 기업들이 미래에도 글로벌 무대에서 도약하려면, 이제 리더십의 축을 경영관리에서 기술혁신으로 과감히 이동시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술과 경영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술 중심의 리더십이란 곧 기술에 밝은 사람이 경영까지 잘하도록 하거나, 경영을 잘하는 사람이 기술도 이해하도록 만드는 통합적 개념이다. 융합형 인재, 융합형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대인 것이다. 1930년대의 생산라인 관리자, 1960년대의 마케팅 귀재에 이어, 2020년대의 기업을 이끌 뉴 타입 CEO는 아마도 코딩과 회계를 동시에 이해하고, 머신러닝 알고리즘과 비즈니스 전략을 한 테이블 위에서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런 최고경영자가 속속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기업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리더십 패러다임의 변화 앞에서, 기술에 강한 대한민국 기업 리더십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경제의 희망이 될 것이다.